경북테크노파크 2017 웹진
Vol.5(통권 6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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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ley Kubrick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안소니 버제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영화의 제목이 생소하지만 본래 제목에서 오렌지가 뜻하는 바는 ‘오랑우탄’ 즉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오랑우탄의 발음에서 오렌지가 나온 것이라 보면 되겠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시계태엽의 기계성과 조작성을 오렌지의 말랑말랑한 유연성과 자연성에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는데, 그럴듯한 해석이다.

시계태엽 인간, 즉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시계태엽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많은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는 심각한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영화가 탄생한 영국에서 조차 20년이 넘게 상영금지 조치를 당해야만 했다. 지금도 영화에 대한 많은 비평과 찬탄이 엇갈리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확실하고도 무거운 것이라 충분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현대인의 고뇌, 문제점 같은 주제는 많은 영화에서 다루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리 생소한 주제는 아니다. 오히려 진부한 주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1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독특하면서도 쓸모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도덕적 기준을 넘어선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대한 시각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어 놓을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의 본성이 ‘선(善)’이 아니라 비록 순수한 ‘악(惡)’ 일지라도 그 개인의 본성은 존중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찬찬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미래의 영국을 배경으로, 주인공인 10대 소년 알렉스는 자신을 따르는 동료들과 함께 ‘이유 없는 폭력’에 심취한 생활을 즐긴다. 늙고 지친 노숙자를 폭행하는가 하면 아무 집에 들어가서 폭력과 강간을 행하기도 한다. 알렉스는 이러한 행위에 대한 아무런 죄의식이 없어 보이며, 영화를 보는 사람은 알렉스의 파괴적인 악행과 파렴치한 태도에 치를 떨게 된다. 마치 텔레비전 뉴스 속에서 흉악범의 소식을 접했을 때와 같다.

그러나 알렉스는 동료들의 고발로 인해 살인현장에서 경찰에게 붙잡히게 되고 14년형을 선고 받는다. 수감된 알렉스는 내각에 의해 ‘루드비코 치료법’의 피실험 대상자가 되는데, 루드비코 치료법이란 특정한 행동에 대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즉 알렉스가 그동안 저질러 왔던 폭행이나 강간을 다시 행할 수 없도록 신체에 그러한 행위에 대한 거부체계를 심는 치료법이다.

알렉스는 이 치료를 2주간 받게 되고 2년 만에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감옥에서 나온 알렉스는 완전히 다른사람이 되어 예전 동료들의 구타에도 저항 한번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완벽한 피해자의 입장으로 바뀐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동들이 모두 알렉스의 자유의지가 아닌 실험에 의한 생체적 거부반응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알렉스는 고통을 못 이겨 자살을 시도하지만(이 자살 역시 알렉스의 의지 보다는 타인의 부추김에 의해서다) 실패한다.

알렉스가 병원에 입원하고 루드비코 치료법을 비난하는 대중의 목소리가 커지자 내무부장관은 알렉스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에게 ‘화해’를 요청하고 루드비코 치료를 되돌려 알렉스의 본성을 찾게 해준다. ‘나는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알렉스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사실 이 영화는 원작인 소설과 다른 점이 꽤 많지만 특히 결말부분의 차이가 크다. 소설에서는 돌아온 알렉스가 또 다른 패거리를 결성하여 나쁜 짓을 하려 하지만 그런 일들에 시무룩해지고 스스로 철이 들어 가정을 꾸리려 하는 것에서 끝이 난다. 어쨌든 소설에서도 알렉스의 자유의지를 중심으로 ‘선’역시 알렉스에 의해 선택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범죄인들이 ‘개과천선’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과천선이란 무엇인가. 허물을 벗고 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그 과정은 누가 선택해야 하며 누가 주인이어야 하는가. 물론 법 규율을 지키고 그 질서 안에서 서로 해치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첫째로 중요한 일이라 봐야겠다. 그러나 그것과 인간의 자유의지, 본성에 대한 존중은 따로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다. 인간은 자신이 행하는 모든 행위의 주인이며 그에 따른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알렉스가 선택하는 모든 악행 또한 그가 선택한 것이고 그 선택은 사회적 법 안에서 책임질 필요가 있을 뿐, 개인의 본성을 뜯어 고치는 것은 또 다른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Stanley Kubrick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살 수 있다.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인간 본성에 의한 선택의지의 존중’ 이외에 ‘선과 악의 구별’ 선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좀 더 심도 있게 들어가 보면, 영화 속 알렉스와 같은 유형의 인간은 보통의 우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유형의 인간으로 구분된다. 알렉스가 惡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반대선상의 보통 인간들은 善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렉스와 같은 유형을 감시 또는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어느 누가 확실히 경계 지을 것인가.(이점에 있어서는 원작자인 안소니 버제스의 소설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알렉스가 마지막에 악이 아닌 ‘선’을 택했을 때 우리는 선과 악의 경계가 단순한 선택이라는 행위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철학자 미셸푸코는 그의 대표적인 사상인 구조주의를 통해서 정상과 비정상, 또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보였다. 이러한 작업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 수행되는데 하나는 기존에 정상적이라고 인정되던 것이 얼마나 일관되지 못하고 불안정한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즉 동일자 내부의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동일자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동일자에 의해 배제된 타자, 그리하여 강요된 침묵 속에 갇혀버린 타자의 목소리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이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서 동일자 자신이 그어 놓은 경계선을 의문에 부침으로써 양자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드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Stanley Kubrick은 이 영화를 통해 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알렉스(동일자에 의해 배제된 타자)가 동일자인 나와 우리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게 함으로써 독특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즉 동일자 내부의 균열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선에 서있을 뿐이다.

Editor Profile 황윤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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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획단 경영기획팀